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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 뜻에서

"선비들이 반대파에게 몰려"

이 부분 자세하게 궁금해요

이것에대한 이야기도 알고싶습니다


익명의 질문자 등록일 2018.08.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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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ki레키

    사화는 사림들이 화를 입었다는 뜻으로 조선시대에서 4번의 사화가 있었습니다. 주로 훈구파에게 당한 사화가 다수고 첫번째 사화는 무오사화입니다.


    무오사화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김일손이 사초에 실었던 일이었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조의제문〉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하는 것이라며 유자광은 김종직과 김일손이 대역부도를 꾀했다고 연산군에게 고했다. 이에 연산군은 김종직과 그의 문인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였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대역의 우두머리로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는 형을 받았다. 또한 김종직의 문도로서 당을 이루어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로 많은 사림들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갔다. 반면 무오사화를 주도한 유자광 등 훈구파는 권력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무오사화의 결과 신진사림파는 중앙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사림은 선조 대에 이르러서는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갑자사화는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큰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연산군이 훈구파까지 제거한 사건이었다. 구체적인 계기는 연산군 생모인 윤씨의 복위문제였다. 성종은 성종비 윤씨가 질투가 심하고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하자 1479년 폐비하고 사사했다. 임사홍의 밀고로 이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은 이와 관련된 성종의 후궁인 엄숙의·정숙의를 죽이고 그의 아들 안양군과 봉안군도 귀양을 보내 사사했다. 또한 윤씨를 왕비로 추존하고 성종 묘에 배사했다.

    이어 연산군은 자기를 견제하는 훈구파와 사림파를 제거하려 획책하였고 폐위 사건 당시 이에 찬성한 자들을 찾아 제거했다. 폭력적인 사화 이후 연산군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으나, 연산군의 방탕한 행위와 폭정의 피해가 심해지자 훈구와 사림의 반격1519년(중종 14) 11월 남곤·심정·홍경주 등의 재상들에 의해 조광조·김정·김식 등 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 중종 즉위 이후 정국을 주도한 훈구파에 대해 신진 사림파들이 정계에 진출해 세력을 늘려가면서 갈등을 일으켰다.


    기묘사화입니다. 특히 사림파들은 중종반정의 공신 중 공이 없음에도 공신이 된 자들을 속아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일부 관철시켰다. 그러자 훈구파들은 사림파들이 붕당을 지어 왕권을 위협하고 국정을 어지럽힌다고 고해 중종은 이를 수용해 사림파들을 숙청했다. 이후 훈구파가 다시 정계의 중심이 되었으나 사림의 대세는 막을 수 없었다.


    다음은 을사사화입니다.

    외척인 윤원로·윤원형 형제가 조카 경원대군으로 세자를 교체하려 세자의 외숙인 윤임과 충돌했다. 세자였던 인종이 왕위를 계승하여 사림파를 중용했으나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에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했다. 윤씨 형제는 명종의 보위를 굳힌다는 미명 아래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등을 축출했다.

    홍문관과 양사의 사림파가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항의하자 사림파 관원을 파직시키고 윤임 등과 종친인 계림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출처:다음백과

    등록일 2018.08.11수정됨 의견 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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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택 금화천사

    조선시대에는 무오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등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게되는 사화가

    여러번 발생을 하였습니다

    지금의 여당.야당과 비슷하게 선비들끼리도 다투고

    싸우면서 암투를 벌이다가 모함하고 죄를 뒤집어 씌워서

    선비들이 죽게되고 유배를 가는 화를 당하는일을 사화라고 하는것입니다

    즉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는 뜻이 사화 입니다

    등록일 2018.08.11 의견 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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